제 670 호 [사설] 내 안의 빈 공간, 감동의 시작
밥 중에 배고플 때 먹는 밥이 가장 맛있다. 배가 부르면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도 젓가락질을 멈출 수밖에 없는 법이다. 밥맛은 본래 그런 것이다. 이 묘한 관계를 다른 일에도 대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수업을 듣는다든지 과제를 할 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장기가 밥맛을 돋우듯, 수업과 과제에 대한 흥미를 돋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채움을 기다리는 빈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족함이나 불완전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을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자 하는 열정을 뜻한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마음속의 공간 말이다. 이 마음은 빳빳한 마분지가 아니라 얇은 습자지와 같아야 한다. 그래야만 무엇이든 잘 빨아들일 수 있다. 혹여 질기고 억센 막이 내 마음의 문을 막고 있다면 그 딱딱함을 걷어내고 미세한 바람에도 일렁이고 잔잔한 습기에도 젖을 수 있는 부드러움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 끊임없이 지성과 감성의 샘물을 찾아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과 감성의 샘물 맛이 더 차고 맛있게 느껴지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그 목마름과 굶주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목마르고 굶주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새 학기가 되면서 신입생과 재학생들이 강의실을 부지런히 오가며 바쁘게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수강 신청을 하는 순간부터 과제를 제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마음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공부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가 대학 생활의 전부는 아니므로 공부 이외의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철학적 고민도 필요하고, 때로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문학은 내가 사는 세상을 풍요롭게 확장시켜 줄 것이고, 예술은 절망하지 않도록 나를 지탱하는 힘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빈 공간이 넉넉해야 한다. 그 공간이 있어야 주변의 것에 대해 호기심도 생기고 소중히 품을 수 있는 나의 계획도 세울 수 있다. 그래야만 내 안에 그 모든 것을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마치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듯이 담아낼 수 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빈 공간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비워야 한다. 교만 속에서 싹튼 껍데기에 불과한 명예심이나 나만 잘 되고자 하는 이기심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나인데, 남에게 잘 보이는 싶은 마음 때문에 가식적인 모습으로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마음속의 갈등으로 인한 잡다한 소음과 세상적인 욕망의 속삭임에 현혹되어 나다운 나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나는 부족한 것이 없기에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에 차 있거나 나는 가망이 없고 여전히 안 될 거라는 지나친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별 것 아닌 일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데 별 것 아닌 일에 감동하려면 내 안에 빈 공간이 많아야 한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야 한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성령에 대한 사모함이 절절하고 진정한 학생이라면 배움에 대한 갈망이 넘쳐나고 진정한 교수라면 학문과 교육에 대한 바람이 남 다르다.
우리 대학교의 인재상은 “감동을 주는 혁신형 인재”이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려면 내가 먼저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 혁신이라는 과제의 시작은 바로 감동을 받고 감동을 주는 아주 본질적이고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현대 문물의 빠른 변화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 어렵고 뭐가 옳은지,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정신적 유대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내 본연의 느낌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내가 느끼는 배고픔은 어제의 배고픔에 대한 기억도 아니고 누가 강요해서 느끼는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나의 배고픔이기에 이를 해결할 음식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마찬가지로 내가 호기심과 소중한 것에 대한 도전에 굶주려 있을 때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공부와 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며 성취하게 된다. 거기엔 어떤 세속적인 욕심이 개입하지 않는다. 순연한 목적에 의해 추구하는 노력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이란 바로 그런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