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5 호 [책으로 세상 읽기] 완벽은 존재하는가?, 책 <완벽에 대한 반론>
[책으로 세상 읽기] 완벽은 존재하는가?, 책 <완벽에 대한 반론> ▲ 완벽에 대한 반론 책표지 (출처: https://jhoons.tistory.com/85) ‘완벽’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완벽’이란 무엇인가. 이따금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 완벽함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곤 한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완벽에 대해서 생명공학적 관점에서 풀어내는 책이다. 우리가 완벽을 지향하기 위해 인체를, 유전자를, 태아를, 향후 미래세대를 개조하고 움직이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당한가? 왜 이 모든 인위적인 행위는 노력으로 치부 받지 못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인가에 대해서 꼬리를 물 듯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인체공학, 생명공학적인 분야에 관심이 많다면, 철학을 비롯한 인류의 행보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한 번 읽어봄 직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완벽이 과연 존재하는지, 그 의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며, 생명공학적인 윤리 문제들에 대해 돌아볼 수 있다. 태아의 생명 결정권, 어디까지를 생명, 인간으로 인정할 것인지 등등 아직 의견이 분분한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세계를 생명공학이 바꾸고 있는 시대의 중심에서 우리는 새로운 윤리를 다시 고안해야 한다. 과거의 윤리가 과연 오늘날의, 미래를 설명하고 중심이 되어 줄 수 있는가. 우리가 빠르게 변하는 만큼,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윤리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인간 자체의 변화를 지향할 수 있는 생명공학, 그 양날의 칼이 과연 어디를 지향해야 할지,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곽민진 기자
제 724 호 즐거운 추석
즐거운 추석 김다엘 기자
제 724 호 [순간포착!] 나의 가을도 그러한가요?
[순간포착!] 나의 가을도 그러한가요? 계절이란 무척이나 신기한 것이다. 따뜻함, 차가움, 선선함, 쨍함 등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전장에서 사라진 말이 그 길을 알고 다시 본래 주인에게 돌아오듯이 적절한 시기가 오면 자신의 때를 알듯이 한결같이 돌아오니 말이다. 또한 추석이 가까워질 때면 바람이 불고 냉랭한 공기가 맴돌기 시작하는 걸 보면 우리 조상들도 지금의 과학 기술이 없었던 시대에서 어떻게 이리도 정확한 24절기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덕분에 우리는 매번 절기를 보며 그 시기를 짐작하고 초복이 다가오면 삼계탕을 끓여 먹고 설이 다가오면 세뱃돈을 준비하며 추석이 다가오면 갖은 음식들과 송편을 빚을 준비를 한다. 이제 정말 가을이 왔나 보다. 아침부터 시작된 선선한 공기가 밤까지 계속 이어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씨라고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단풍의 계절인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흔히 ‘가을 타나봐’, ‘사색에 잠겨본다’ 등의 말이 입버릇처럼 나오기도 하는 가을은 농부에게 중요한 계절로, 추수(가을걷이)라 하여 한 해의 농사의 결과물을 수확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외로움, 사색, 쓸쓸함, 고독 등 감성의 깊이를 자극하고 그 깊이가 절정에 다다르는 계절이 아닐까 싶다. 가을만 돌아오면 괜스레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실로 붙여 막아 놓았던 구멍 하나가 풀어지면서 그동안 잘 버텨왔던 마음을 헤집어 놓고는 한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감정들이 쉴새 없이 몰아치는 것이다. 감정들을 주체하지도 조절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쌓여만 가고, 마침내 쌓인 감정들은 한차례에 걸쳐 폭발하여 큰 구멍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올 즈음에 다시 그 구멍을 실로 꿰매고는 한다. 구멍이 다시 날 때에는 자신을 한탄하며 ‘왜 그랬을까’, ‘나는 왜 이것 밖에 되지 못하는 걸까’, 이렇게 나 자신에게 되물어보고 온갖 철학적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 한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 허공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이 공허하고 아파질 때는 치유의 수단을 찾아야 한다. 운동으로 땀을 흘려가며 기억의 한 켠을 잊어 보는 것도, 책이나 시집을 읽으며 마음을 치유하는 것도, 가족이나 친구 또는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외로운 마음을 달래는 것도, 그 무엇이 되어도 좋다. 아픈 곳을 그대로 두면 상처가 깊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조금씩 마음을 치료하며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 한창 마음 한 구석이 심란할 즈음 시험 기간도 겹치고 하여 학우들의 걱정도 깊어질 것이지만 두려운 마음을 이겨낼 방법이 있다면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학우들도 곁에 있어줄 누군가, 다정한 말 한마디 해줄 수 있는 그 사람 등 나의 가을을 무탈히 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부디 추억에 남을 수 있는 가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시원 기자
제 724 호 [책으로 세상 읽기] 비판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 책 <데미안>
[책으로 세상 읽기] 비판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 책 <데미안> ▲데미안/ 민음사 책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이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깨끗한 집안에서 그야말로 ‘선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집의 하녀들과 장인들이 집 밖에는 부랑자나 강도질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는 ‘악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는 이 두 세계에서 강력한 대립을 느끼기 시작한다. 데미안과 비판적 사고 어느 날, 마을의 한 과수원에서 사과를 도둑맞았다는 사건이 입소문을 타고 돌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친구들 앞에서 으스대기 위해서 그 사과를 본인이 훔쳤다고 자랑하기 시작했다. ‘선의 세계’에 살던 그가 처음으로 ‘악의 세계’에 발을 담근 때였다. 그의 친구이자 큰 덩치를 가지고 있던 프란츠 크로머는 싱클레어를 뒤로 불러 그를 과수원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했고, 싱클레어는 비록 거짓말일지라도 혼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크로머의 말에 따르기 시작한다. 그 뒤로 싱클레어의 삶은 매일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때 그의 앞에 등장한 것이 바로 “데미안”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디 기댈 곳 하나 없었던 싱클레어는 크로머보다 힘도 세 보이고, 행동이 믿음직했던 데미안에게 본인의 잘못을 이실직고하는데, 어째서인지 크로머는 그 뒤로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않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꼈지만, 또 다른 마음 한편에서는 알 수 없는 경탄이 떠오르곤 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중간 내용이다. 후에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거쳐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그리고 에바 부인을 만나며 성장해 나간다. 결국 항상 남들을 통해 답을 찾던 싱클레어는 본인의 내면에서 “데미안”을 찾게 되고, 이로써 그는 더 이상 데미안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소설에서 “데미안”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 아닌 “비판적 사고”다. 줄거리의 중간에는 데미안이 성경 속 이야기를 본인의 생각대로 재해석하여 싱클레어에게 큰 충격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소설 속에는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피하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데미안의 특징을 따져본다면 아마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협박하는 내용에서 오히려 크로머의 약점을 찾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과수원 주인이 사과 도둑의 범인을 찾고 있지 않았다든지, 싱클레어를 협박해 받아냈던 돈이 알고 보니 고발 보상금보다 터무니 없이 많았다든지 말이다. 결국에는, 싱클레어 본인이 노력했다면 스스로 크로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상황들이 데미안은 가지고 있었던 비판적 사고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받았다고 소설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삶을 돌아보며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는 1877년 독일에서 개신교 선교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부모님들의 교육 방식은 엄격하기 그지없었고, 헤르만 헤세는 그 부모님들로부터 종교적 신념을 강요당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선교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방황의 삶을 이어 나갔다. 이후 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삶과 전쟁의 의미, 전쟁 후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러한 사려 깊은 생각은 여러 문학 작품을 통해 발현되곤 했지만, 당시 나치즘을 표방했던 독일에게 유대인을 옹호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눈엣가시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그는 조국인 독일을 져버리고 스위스로 망명, 1962년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다양한 심리 치료를 동반했다. 특히 동양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의 작품 <싯다르타>에서 불교적 색채를 강력하게 확인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헤세의 작품은 자전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기에, 일종의 정신 질환 치료 과정에 있지는 않은지 검토해 볼 만하다. 이러한 정신적인 질환을 이유로 하는지, 헤르만 헤세의 문체가 ‘다소 난잡하고 쓸데없이 이상적이다’라는 평가를 종종 받는다. 이 맥락에서, <데미안> 또한 전쟁의 참상과 그 이후의 시대를 글 속에 반영하는 것에 있어서 같은 비판을 받았으나, 그의 1946년 작인 <유리알유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보면 당시의 어지러웠던 판국을 이해하는 것에 헤세의 소설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하다고 가히 인정할 만하다고 볼 수 있다. 두 개의 세계와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하여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인간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내면의 길’이라는 생각에 집중했다. 세계 대전의 피로함을 느꼈던 그는 선의 세계-악의 세계로 나누어진 이분법적인 사고를 철저히 파괴하고, 그 누구도 선인이 아니고 또한 악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자 노력했다. 다시 말해, 전쟁의 참상을 겪고도 그것이 필수적이었고 정당한 과정이었다고 주장하는 당시 유럽 사회의 이기적인 각국들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며, 이는 비단 나치 독일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헤세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데미안”이라는 비판적 잣대를 이용하여 스스로 목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진취적인 자세가 필요하며, 이 데미안과 본인이 하나가 될수록 탄탄한 내면이 구축되고 이는 곧 사회로 확장된다는 사고 과정을 거쳤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모두 선의 세계-악의 세계가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며, 그 속에서 기존에 정립되어있던 둘 사이의 경계가 붕괴하고 신시대로서의 사회가 정립되어 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분쟁은 오늘날까지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인류는 이 국제적인 아젠다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세계시민으로서의 마음가짐을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김상범 편집장
제 724 호 [영화로 세상 보기] 고전 로맨스 영화의 정수, 영화 <타이타닉>
[영화로 세상 보기] 고전 로맨스 영화의 정수, 영화 <타이타닉> ▲영화 타이타닉 포스터 (출처: 나무위키) 타이타닉, 고전 로맨스 영화의 대표작. 섬세한 영상미와 디카프리오의 전성기 시절, 아름다운 사랑의 비극이라는 클리셰적인 스토리라인으로 많은 이들을 감동하게 해 준 고전 명작영화이다. 부유층들의 사치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꿈의 배라고도 불렸던 이 배 안에서 두 남녀주인공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서로의 꿈과 미래, 목숨까지 불사할 사랑. 그런 열렬한 사랑 속에도 배는 순항하지 못하고 빙하에 부딪혀 위기에 봉착한다. 살아 나갈 수 있는 구명보트는 한정되어 있었고 배는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그 속에서 서로를 생각하는 주인공 연인 외에도 서서히 다가오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인상 깊다. 다가오는 죽음 속에도 서로를 끌어안으며 침대에서 눈을 감는 노부부, 다가올 미래를 모른 채 잠에 빠져드는 어린아이들, 생과 사의 교차 속 그것을 각자 받아들이는 방식이 생각할 점이 많은 영화이다. ‘내 최고의 행운은 도박에서 이 배의 티켓을 딴 거야, 당신을 만났으니까.’ 남주인공 잭이 저체온증으로 죽어가면서도 여주인공 로즈를 걱정하며 한 말이다. 죽어가는 와중, 상대를 생각할 수 있는, 두려움을 뛰어넘는 사랑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로 모두 각자의 운명적인, 목숨도 불사할 사랑을 꿈꾸길, 삶에 대한 자세를 되돌아보길 기대한다. 곽민진 기자
제 724 호 [기자석] 초연결 사회와 잊히는 자들
초연결 사회와 잊히는 자들 IT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는 서로 간의 긴밀한 디지털 연결 관계를 만들어 냈다. 이것을 우리는 ‘초연결사회’라고 부른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휴대전화는 50억 대를 넘어가고 있고, 한국의 경우 무려 국민의 약 95% 정도가 스마트폰을 사용할 정도이니 그야말로 휴대전화 하나로 만사가 형통할 지경이 이르렀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기술 발전을 환영하고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연결사회는 사람과 사물 간의 원활한 소통이 기반이 되어야 만족하는 사회이므로, 역으로 생각해보면 기기 없이는 네트워크 연결에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 된다. 이는 곧 초연결사회로의 도약이 사람이 기기에 의존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의존성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겪으며 온라인 시장이 가열되며 더욱 민감해졌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전자기기 문명을 향유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선가 전기가 없는 이전으로 회귀할 가능성 또한 견지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2021년, KT의 통신기기가 말썽을 부리기도 했고, 2022년에는 카카오톡 ‘먹통 사태’라고 명명할 정도로 네트워크 연결 장애가 사회에 큰 파급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켜봐 왔다. 한국 사회는 특히 초연결사회와 동시에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21세기 청년을 아우르는 젠더 갈등부터 시작해 저출산 고령화와 ‘MZ세대’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세대 갈등, 그리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대중교통 점거 시위 등이 그 증거로 남는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봤을 때,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있는가, 멀어지고 있는가? 기술이 수반되더라도 사람들의 시민의식이 성장하지 않으면 기술의 발전이 가지는 의미가 폐색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SNS 및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서 사람들은 본인이 소속하거나 소속하고 싶은 집단에서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며, 반대의 의견은 무작정 비난하는 상황을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삶과 직결되지 않은 문제가 아니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인간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데, 괜히 힘을 들이면서까지 남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란 에너지 낭비라고 여길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의견을 수용하고 가장 최선의 답을 찾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초현실사회는 특정 사람들끼리의 연대만을 강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이면을 들춰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태에서 사회로부터 점차 잊히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 약자’는 그들의 대표주자로 작용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키오스크는 이제 외식산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기다. 연세가 지긋하거나 몸이 불편한 손님들은 키오스크보다도 사람을 통해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필요한 능력이 바로 ‘미디어 리터러시’다.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대체적으로 디지털 환경에서의 언어를 이해하고 다룰 줄 아는 새로운 능력을 중점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한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의 사회 심리학 교수인 Sonia Livingstone이제시한 미디어 리터러시의 구성 요소에 따르면 접근 능력, 분석 능력, 평가 능력, 창조 능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필자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접근 능력이다. 사회적 약자를 비롯한 모두가 키오스크와 같은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시대의 과제이자 책무인 것이다. 이는 통상적으로 적용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만을 제고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 발생했던 다발적 흉기 난동 사태의 유형‘묻지마 범죄’를 따져보면, 대부분의 가해자가 경제적 빈곤을 겪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외 계층이라는 표본이 존재한다. 국무조정실의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은둔형 외톨이 청년이 24만 명 규모라고 밝혀진 바, 가해자들은 보통 자기 처지에 대한 불만이 자신을 방치한 사회를 향하고 있기에 그것이 범죄의 형태로 표출된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회로부터 잊힌 자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모두가 함께하는 진정한 초연결사회로 거듭나기를 고대한다. 김상범 편집장
제 723 호 [순간포착] 오늘을 복기하며
[순간포착] 오늘을 복기하며 사람은 고개를 들고 걸어 다닐 수 없다. 매사에 발밑과 눈앞을 응시하며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고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하늘 풍경을 사진에 담거나 삶이 힘에 부쳐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기 위함도 있기에 우리는 살면서 전혀 고개를 위로 아니 들지는 않는다. 그저 그 자세가 흔치 않을 뿐이다. 굳이 하늘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오늘 하루는 제대로 살았는지, 누구에게 잘못한 일은 없는지 등의 자아 성찰 또는 반성의 시간을 갖기 위함도 있다. 바둑에서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 부터 그 출발점을 되돌아보는 복기가 있듯이 한낱 놀이에서 조차도 반성의 시간이 있으니 인생에서는 더욱이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자기 전 하루에 한 번씩은 아니어도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가끔은 복기의 시간을 갖는 것도 인생에서 필요한 부분이다. 이는 자신의 인성이자 품격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니 일종의 인생 교양 수업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단 10분도 채 되지 않는 교양 수업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값진 이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는 학우 여러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시원 기자
제 723 호 [만평] 다시 시작
김다엘 기자
제 723 호 [책으로 세상 읽기]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하여, 책 <작별하지 않는다>
[책으로 세상 읽기]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하여, 책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 문학동네 / 2021 (출처: 조선일보) 책의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 이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여러 궁금증이 들었다. ‘무엇과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애시당초 ‘작별’이란 무얼까'와 같은 것들이 말이다. 책을 거의 중간까지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제주 4/3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에 대해 아는 학우들이 얼마나 있을까? 장담하건대 안다고 할지라도 이름만 접해봤을 학우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가봤을 ‘제주’, 부담 하나 없이 살러가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제주’. 그렇다, 그런 제주에서 일어났던 일임에도 우린 우리가 겪은 일들이 아니기에 잘 알지 못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우리가 광주 사람들처럼 치를 떨 정도로 분노할 수 없듯이, 기껏해야 교과서에 한 두 문단으로 소개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많이 알 수 없다. 그조차도 정권이 바뀌고, 교과서가 개정되면 내용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 이 사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주도 역대 참사 중 하나로 손꼽히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학살된 대표적인 사건이다. 무려 민간인만 약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 있던 이유는 4.3 사건이 약 7년 7개월에 거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마을에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여 95% 이상이 소각됐다. 누군가의 가족, 친구, 사랑하는 이들이 명령 하나에 집 채 타버리거나 죽게 된 것이다. 이때의 희생자 수는 최대 제주도민의 1/8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이며, 아직까지도 유골 발굴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경하’와 ‘인선’ ‘경하’는 이 책의 주인공으로, 작가이다. 학살에 대한 소설을 쓴 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긴 무력함과 우울감에 빠져 하루에 한 번 죽조차도 겨우 먹는 상태로 발신인을 누구로 해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하는 유서를 여러 번 다시 쓰고 찢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경하’의 친구, ‘인선’은 몇 편의 영화를 내고 목공소를 차린 인물이며, ‘경하’와 마찬가지로 억압받았거나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크다. 그 둘은 언젠가 제주도에서 함께 작업을 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매년 이런저런 일로 흐지부지되어 후년, 내후년으로 미뤄지기만 하였다. 그렇게 약속을 한 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제야 살아보겠다며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경하’에게 ‘인선’의 연락이 온다. 병원으로 와달라는 긴박함이 느껴지는 짧은 문자였다. 병원에 가자 ‘인선’은 침대에 누워 3분에 한 번씩 손가락을 바늘에 찔리고 있었다. 목공소 일을 하다가 검지 손가락과 중지 손가락 한 마디씩이 잘려버리고 만 것이다. 봉합 수술을 받아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걷지도, 심지어 말도 많이 해서는 안 되는 ‘인선’은, 그녀의 친구 ‘경하’에게 제주도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 가서 돌보던 앵무새 ‘아마’가 죽지 않도록 물과 밥을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경하’는 ‘인선’의 집으로 향하게 되고, ‘인선’을 통해 그녀의 어머니가 겪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가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이다. 작별하지 말아야 한다. ‘작별’에 대해서 사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 또는 그 인사”라고 정의한다. 먼 해외로 나가게 되어 가족과 인사를 하거나,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순간. 또, 누군가 죽었을 때에도 우리는 작별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작별은 ‘잊혀짐’이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있게 할 수는 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그 대목처럼 우리가 죽은 이들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게 할 수는 있다. 3분에 한 번씩 손가락을 바늘에 찔러야 신경을 살릴 수 있던 ‘인선’처럼. 광주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 사건 뿐만 아니라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와 같은 많은 사건들을 말이다. 가슴 아픈 일들이지만, 외려 가슴 아픈 일들이기에 더욱 자주 상기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채윤 수습기자
제 723 호 [영화로 세상 보기] 원자폭탄의 아버지,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로 세상 보기] 원자폭탄의 아버지,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극 중 명대사로 꼽히며 실제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에 성공하고 한 말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어마어마한 원자폭탄의 위력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2막의 구성 속에 세 개의 이야기 지난 8월 15일에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는 2막의 구성 속에 세 개의 이야기를 교차편집하는 양상으로 극이 구성된다. 먼저 풀컬러로 구성된 극은 오펜하이머가 유럽에서 이론물리학과 양자역학을 공부한 뒤 미국으로 돌아와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고,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여준다. 두 번째 빛바랜 고전영화 색감은 1945년 오펜하이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원자력 위원회의 루이스 스트로스가 오펜하이머를 매장하기 위해 누명을 씌우고 청문회를 여는 내용이며 마지막 흑백의 색감은 1959년, 루이스 스트로스가 상무부 장관 임명을 위한 청문회에 참가하는 내용이다. 개발한 오펜하이머조차 두려워했던 원자폭탄의 위력 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영화 오펜하이머는 단순히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연대기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오펜하이머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연출과 두 개의 청문회를 맞세우는 구성을 통해 극의 긴장감과 몰입도를 더 높여준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오펜하이머가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승승장구할 때 오펜하이머는 국민적 영웅이 된 것 같은 기쁨과 동시에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때문에 이후에는 원자폭탄 개발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조차 사용을 반대한 원자폭탄은 과연 전쟁을 막을 무기일까, 전세계를 핵전쟁으로 몰아넣을 무기일까? 전 세계 핵무기 보유 근황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22 전 세계 핵무기 수는 1만 2507기에 달하며 미국과 러시아가 전 세계 핵무기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 핵무기 수는 냉전 말기였던 1986년 7만여 기에서 점차 줄여왔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미-중 대결 격화 등으로 인해 다시금 늘어나는 추세이다. 특히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핵무기 사용 의사를 보이기도 했다. ▲국가별 핵무기 보유량 (출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핵무기를 줄여가는 노력 필요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자폭탄으로 인해 전쟁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원자폭탄이 개발된 후부터 현재까지 세계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단지 모두가 핵폭탄의 위력을 잘 알고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늘 핵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미 핵무기가 개발된 이상 그것이 개발되기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지만 국가간의 상호협력을 통해 핵무기를 줄여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윤정원 부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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